권력으로서의 자본론
-졍치경제 판을 다시 짜야한다-
Nitzan/ Bichler/ 윤화진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는 18세기 사람이다
인간은 독립된 개인으로 서로 교류하지만
유기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당히 기계적교류 할 뿐이라 했습니다.
상호교류의 목적은 물질적 희소성과 이를 만족시키려느 욕망이 있어
공급’과 수요를 창출하고 사고 파는 관계로 매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논리적이며 그 혼돈 속에서도 질서가 있다고 봅니다. 봉건적 사회 체제(ancient regime)의 위계적 구조 대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평등한 메커니즘이 들어서게 된다.
그 전에는 사회적 질서란 신의 명령에 의해 성직자와 왕의 손을 거쳐 강제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경쟁’에 의해 창조되는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들은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과 충돌하며 또 서로를 이용하면서 행동한다. 가시적으로 드러나있는 방향설정이나 지휘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필요도 없다.
이 체제는 그 자체가 마치 시계처럼 스스로 알아서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외부에서 부터의 개입이 있게 되면 사회질서가 교란당하게된다고 보고있다
이 '자발적인 사회질서는 부의 가장 궁극적인 원천으로서 정부의 개입이나 여타의‘규제’는 필연적으로 해로운 것이 되고 이는 최소한으로 줄여야한다. 그 최상의 체제가 바로 자유방임(laissez-faire)의 체제이라 했습니다.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뉴턴의 수평적 사고가 자연에서 뿐 만아니라
사회에서도 수직적 위계 질서라는 사고 방식을 대체해 버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볼테르나 몽테스키 등이 억압적인 프랑스 왕정을 대체할 만한 강력한 대안의 원리를 뉴턴의 사유에서 발견하였다.
미국에서도 벤자민 프랭클린과 다른추방자들이 견제와균형/Check and balance 즉 권력의 분산같은 이름아래 이 뉴턴의사고방식을 도입하였다.
19세기가 되면서 이 뉴턴 식의 ‘함수적’사고 방식이 모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침투한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현상을 두 물체 사이의 상호의존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려 했다. 경제학의 경우 핵심이 되는 함수 관계는 가격과 생산의 관계로 보았다.
19세기 말에 새로운 주류학파로 출현한 신고전파 경제학은 벤담의 쾌락과고통의 미적분학을 아예 인간사회의 운명을 이해하는 주된 도구로 만들어 버리기에 이르렀다.
정치경제학을 태동시킨 이 본래의 사고 방식은 현대인 이 사회를 사고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여전히 중심적인 사고 방식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다음 세 가지가 특히 결정적영향을 받었다.
첫 째, 자기 중심주의(egocentrism) 탄생이다.
원래 인간이란 자연상태에서 집단이 아닌 개인단위로 살았던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이 개개인은 자신들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으며 외부의 지휘 감독따위는 필요가 없다. 이 들의 자유는 사적인 것이였다. 공적 또는 정치적 영역에서는 본질적으로 강제와 지배의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경제적 관계는 시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시장이야 말로 사적 경제가 공공의 정치 영역과 분리되는 확실한 방법이다.
시장이 형성되어 그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분리되는 과정은 실로 어렵고 긴 시간이 걸렸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들이 자기 중심주의적 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들의 본성이 사회를 조직하여 공적 또는 정치적 방식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기시작하였다. 즉 초기사회는 집단적인 생활이 대부분이었고, 거기에서 개인들은 심히 의존적이었으며사회의 작동은 주로 강제라는 방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개인주의, 노동분업 독립적 개인의 상호작용 같은 것들이 나타날 때 비로소 풍요로운 삶이보장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메커니즘이 바로‘시장이다
어디에서든 시장원리가 경제를 지배하게된 곳에서는부와 자유가 증대된다. 명령이나 권위 따위가 계속 지배하는 사회는 여전히 빈곤의 지배에 남게 되었다.
물론 시장경제에서 도 집단의 통제 또은 조정을 필요로한다. 하지만 그런제도들은 오직 자발적인 것일 때에만 제대로 작동한다.
시장이야 말로 우리가원하는 바를 사고 팔고 정보를 제공하고 기술을 확산시키고,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최상의 방법이다.
시장이야말로 권력과 권위주의로부터 개인들을 지켜주는 최상의 보호장치가 됬다. 이 시장이야말로 돈으로살 수있는 최상의 민주주의라고할 수있다.
셋쩨, 정치경제학이 현대인의 사유에 끼친 가장혁명적인 변화는 바로 자본이라는 개념의 출현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노예와 주인, 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은 항상 있었고 이러한 갈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로 언제나 어떤 비인격적인 제3의힘인 종교아 있였다. 그리고 필요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동양사회의 농민들은 그들 머리위에 군림하는 전제자를 이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만 했다.이슬람(Islam)이라는 말 자체가 신의 의지와 그에 대한 불복종의 처벌을‘감수’한다는 의미이다.
서양사회의 농민들 또한 왕, 군주, 영주를 비슷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되었고, 아닐 경우엔 성직자들이 으름장을 놓는그 지옥불에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했다.
자본의 출현으로 이러한 지배체제에대한 아주 근본적으로새로운대안이 나오게되었다. 자본의 사적소유라는 형태는 노예나 토지의소유와는 달리 신성한 것도 독점적인 것도 아니다.
원리상으로 따지면 자본가가 될 자유는 만민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의결과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정치적질서를 건설할 근본원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젠 왕이나 군주에게 굳이 몸을 숙이지 않고서도 사업의번창을얻을수있게 됬다.
또커다란 부를 얻는데에 굳이 교회의축복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물질적 풍요의 근본은 평화롭게 모든 참가자에게 혜택을 가져다주는시장의 작동에있기 때문에 굳이 인간 집단끼리 싸우고 빼앗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희망적 전망은‘경제성장’이라는 관념을 통하여 결정되고 또확산되었다. 18세기에서 보면 이러한 사고방식과 관념을 가져온 정치경제학은 해방의 이념으로서의 성격을갖는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그후에 세상은 계속변해왔는데 정치경제학의 이 기본원리들은 그러한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정된 채 버티고있다는데에있다.
물론 그 동안 정치경제학이 방법이나 이념의 측면에서는 다양하게 또 크게 변해 온 것이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 신고전파 경제학, 네오마르크스주의, 케인즈주의, 신리카도주의, 통화주의 등등의 새 조류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채워졌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가져온 혁신도 무수히 많아서 몇 개만 예를 들어보아도 변증법적 방법, 생산 함수, 수학적 기법, 경제측량기법, ‘거시’경제학, 기업경제와 금융 등등을 말할 수있다.
이 모든 정치경제학의 조류들은 공적·사적 영역의 이분법에 뿌리를 두고있다. 정치경제학의 자유와 균형의 개념에 기초하고있는데, 이 균형의 개념은 사회가 동질적인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을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탐욕 부정한 치부 독과점 또는 정경유착이란 것이 없이 자유경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곧 정치경제학이 사회의 근저를 이루는 불변의 실체, 사회정의 라는 개념에 뿌리박고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 밀턴프리드만의 “공짜점심이란 없다”라는 유명한말은, 18세기 프랑스의 질량불변의 법칙을 발명했던 앙트완느 라브와지에(Antoine Lavoisier)의 말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자, 신고전파 할 것 없이 정치경제학자들은 모두 내재적 가치의 등가/intrinsic equivalence라는 것이 생산과 교환과정에서 작동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이는 바로 라브와지에의 법칙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이런 식의 관념은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과 홀로그램(hologram)의 발명 등만 예로 들어보아도,기존의 객관성, 공간, 시간, 실체와 질량등의 관념은 근본적인 도전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18세기와 19세기에 공유되었던 시장의‘효율성’에대한 믿음, 자본이 민주화’를가져온다는관념, 또‘정치학’과 ‘경제학’의 분리의 관행등은 21세기에들어선 지금 상당히 고루한 것으로되었다.
‘노동’과‘자본’, ‘시장’과‘국가’, ‘생산’과‘문화’, ‘가치’와‘가격’등의 전통적인 정치경제학의 기본 범주 자체가 이미 예전처럼 명확한 의미를 갖지를 못하게되었다.
엄청난규모의 반(反) Globalization의 출현이라든가 얼마전 프랑스등지의 경제학과 학생들이 신고전파 주류경제학교과서들을‘ 자폐증말더듬이’(autism)라고 거부했던 사태 등은 21세기의 현실앞에서 발 부칠 곳이 없는 것이다. 거게에다 고립적 쇼벤니즘의 Trupnomics 의
등장을 사태을 더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다.
물론 정부와 자본은 여전히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에 재정적 지원을 퍼붓고 있고, 대학과 학계는 거기에 협조하고있으며, 대중매체는지배계급이 단단히 장악하고있다. 그덕에 정치경제학이라는 구조물은계속위용을 뽐내며 버티고있다. 하지만 지적인 차원에서 검토해 보면이미내부로부터 붕괴하고있는 허약한 구조물일뿐이다.
변화의 때가 무르익었다. 하지만언제나그렇듯 변화는기회와 위험을 함께가져온다. 기존의 정치경제학의 무능력으로 인해 생겨난 진공상태를 틈타서 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구주의 해체 , 문화와 정체성’(identity) 등등의 개념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요즘의‘비판적 사회 과학’진영에서는 꽃밭의 꿀벌들 마냥 비행기 타고 이런저런 학술 회의를 옮겨 다니면서, 최신형 노트북 컴퓨터하나 달랑무릎위에놓고‘근대’, ‘진보’, ‘계몽’,‘과학적진리’같은 엄청난 용어들을 멋대로 가지고 노는 글을 논문으로 쓰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렸다.
이점은 포스트모더니스트( 이성으 죽었다) 들도 스스로도 모두 잘 알고있는바이다. 그들도 한 참 돌아가고있는전자렌지에 머리통을밀어넣는 따위의 짓은결코 하지않을테니까.정치경제학은 응당 무너져야 한다. 그 기반이 되는 18세기식 기계적 세계관은 이제 더 이상 버텨낼수없으며, 또오늘날의사회적현실과도 모순 없이 양립시킬 길이없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같은 것으로문제가 풀리지도 않는다. 해답은 보편주의의 희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보편주의를 찾아내는것이다. 질서, 진리, 조화등의 것을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 개방적이고 민주적인방식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핵심개념들을그 것들이 진화해 왔던 맥락에 비추어 다시 재검토해 볼필요가있다. 그리고 세상이 그 때와 어떻게 다르게변해왔는지도볼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나가는 가운데 우리의 이론의 범주를 다시 개발해 내는것이필요하다. 낡은 정치경제학을 해체하는 것만이아니라 새로운 경제학을건설하는것, 그것이우리앞에 놓인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