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화진
평생 힌 한 한복만 잘 달여 입으시는
할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 오셨다.
늘 무표정이신 분이 좀 얼굴이 상기 되어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사실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벌어 진 모양이다.
서너집 건너 내 중학교 한반 친구 순택이 아버지도
그 식구들이 집에 혼자 두고 떠난 케이스였는데
방에서 혼자 얼어 죽은 것이였다. 동내 남은 몇분이 오늘
그 시체를 방에서 거두어 묻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마음이
더 착찹하여진 할아버지 심경을 이해 할 것같았다.
이제 까지 할아버지와 밥상을 함게 한 적이 없었는데
이 날 저녁은 할머니께서 정성드려 할아버지와
합상을 차려 주시고 집안에서 나의 격이 한 단계 높아 졌다.
집안의 가장의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 였다.
아침 일직 이러나 제 3의 도강 준비를 하며 곧 어머니와 동생들을
대리고 오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가볍게 집을 나선다.
지금, 아직 중학교 2년생인 미성년이고 아무리 전쟁중 이지만 자칫 목숨을
건 얼음판의 한강 3차 도강은 지금생각해도 엄청난 무용담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감남 과천에 두고 온 어머니와 여동생 셋을 데려 오려는 마음에는 하나도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이면에는 무서운 정치적 핍박의 스켄달이 깔려 있었다.
나의 도강작전의 수개월전 인민군의 서울 점령시 남으로 피난하지 못한
소위 잔류파는 도강파들의 귀환으로 무참히 처형되거나 부역했다는 억울한
누명으로 괴롭힘을 당한는 것을 나는 어린눈으로 목격했다.
또한 서울을 텅 비워놓는 군사작전 말고도 사상적인 심리전 같은 것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전쟁사를 어덯게 해석할런지
후세에 기록되겠지만 이는 죄없는 사람들이 격은 금세기 가장 더러운 정치적
스겐달의 하나로 기록 되야한다.
이런 정치적 사상적인 이유로 피해를 받지 않으려는 공포감이 나의 3차 4차
도강을 감행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서울 탈출기에는
기록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비극들이 어린 나의 눈에 남아있다.
우리의 모세는 없었다.
행복의 약속, 기도, 하늘의 축복, 십계명, 예언자의 계시도 없었다.
시련과 고난 뿐이였다. 현대판 출애급기 이다.
길가에 버리고 간 포대기에 쌓인 간난아이들, 골모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서둘러 피해가고 서로 뒤 돌아보며 측은해서 바라보는 눈길,
서로 잘 아는 동내 어른이나 젊이는 동사무실등에 불려가 시퍼렇케 멍들도록 얻어 맏고
돌아 오는 일은 다반사였다.
아직도 이해안되는 것이 서로 잘아는 사람들이 서로
때리고 패는 행패를 서로 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엉터리 이념갈등이란 것이
작은 동래에서 서로 형제처럼 오손 도손 지내던 인정이나 소속감을
송두리째 아서 갇다.
나는 무사히 그날 오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두고 온 과천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여
서둘러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끌고 간 손수래등을 모구 버리고 작은 꾸래미들을
만들어 어린동생들의 등에 미게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4차 도강에 나셨다.
그 손수래의 추억, 지금 어른들이 끌기에도 어러운 무게의 수래를 밀고
가파른 관악산 고개를 어덯게 넘었는 가는 아직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오르는 고난의 버금가는 장면이리라.
나는 60년후 성지순래에서 그 시나이 산 앞에 까지 가서도
나의 피난의 기억이 떠 올라 산에 오르기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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