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화진
지금의 과천의 어는 작은 마을에서
일직 출발해서 노량진 근처 한강 가에 도착했다.
나의 이 마지막 도강은 어머니와 셋여동생과 함게
정말 죽기 살기의 결판이였다.
이미 여러 곳에서 중공군이 무리지어
한강을 건너가고 건너오고 있었다.
도강 자체의 위험보다 도강중에
혹시 있을 비행기의 기총소사 공격이다.
허허 벌판에 놓인 위 아래의 위험이다.
나는 그때 기도라는 것을 몰랐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그러한 처참한 위험에는
빠지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고
이제 까지 살어 오면서 알지 못 할
그런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어린 여동생 셋과 어머니와 서울 귀환의 도강을 마쳤다.
나는 지금도 행운과 기적으로 믿고 있다.
집으로 향해 무서운 속도로 걸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무사히 맏나던 장면은
지금 기억이 흐미하다.
기뻐서 얼사 안고 울고 불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오히려 어덯게 살어 갈 것인가가 더 머리를 조여 오는 것이였다.
여섯칸 대청마루, 아짜문의 방 문짝이
덩그러한 큰 한옥의 집으로 돌아 왔으나
먹을 것과 뗄 것이 없었다.
지금도 이상한 것은 두번의 북한 지배하의 생활을
경험했는데 갑자기 주변의 먹을 것들이 사라지고
飢饉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기를 알아 차리고 먹을 곡식을 숨기기 시작하고
먹거리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현상이다.
지금의 식량부족의 북한 실정를 보는 듯하다.
하루 하루가 먹고 사는 일의 걱정 뿐이다.
나의 여섯 식구 먹고 사는 생존 전략은
먼저 도강작전의 무용담 처럼 다시 시작됬다.
지금 아현동 고개를 지나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길에 시장이 서고 있었다.
옷가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길거리에 널려 장사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
신기하게 통용되는 화페는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있는 화페였다.
북한 화페는 기피하는 통화였다.
나는 시장바닥 아래 위를 돌아보고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9.28 서울 수복때
미군 부대가 주둔하던 곳에서 남아 돌아가던
소위 C 래이숀 깡통음식, 미국 담배,
드롭프스 라는 사탕과자, 심지어 쵸코랫 등이 사고 팔리고 있었다.
상당한 량의 지하경제 활동이 벌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많은 미제 물건이 거래되고 있었는데 나의 중학교
2학년의 영어실력이 위력을 발위헤서 내용물들을 알려주고 번역을 해서
내용물에 따라 가격을 정해주고
나는 이를 떠 싸게 유리하게 사고 팔수가 있었다.
깡통속의 함버거, 콘비푸, 닭고기, 베이콘등은 인기가 있어
다른 채소 콩 등에 비해 몇배를 받고 팔 수가 있었다.
양 담배 럭키스트라이크는 카멜, 체스타필드는
필립모리스 보다비싸게 잘 팔렸다.
쥐고리 만한 영어실력으로 장사가 잘 되고 소위 지하경제의
스타 프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이장사로 식구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적지않이 돈이 벌였다.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장사 자본을 넉넉히 대주셨다.
장사가 잘되니 모두가 부러워하는 팔목시계도 사서 찰 수있었다.
나의 영어실력이 생존수단이였다.
소위 미제 '야미시장'의 지하경제는 왕성하게 번창했다.
하루는 시장에서 책상만한 좌판을 펴고 있는데
한 중년 아줌마가 다가와 따라 오라는 것이다.
미제 물건 구입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무었이 있느냐고 물으니 무조건 따라오라는 것이 였다.
지금 생각하니 서대문 고급주책지로
남측의 전 장관 지내던 사람 집이다. 안으로 드러오라고 해서
잔득 겁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니 서울말을 쓰는 군복차림
중좌 (중령) 계급의 장교가 웃으면 나를 맞는다.
마음이 놓이고 나를 해코자 하는 분위기는 아니였다.
미제 물건 장사를 하는냐고 묻길래 식구하고 먹고 살려고
장사하고 있다고 했더니 이야기들어서 알고 있는데
양담배하고 미제 몇가지를 가지고 오면 쌀하고 바꾸어 주겠다는 제안이다.
소위 우리가 아는 군대와의 부정거래의 전형이다.
나는 힌 쌀밥이 머리에 떠오르고 전쟁중의 큰 횡제를 마다 할 여지가 없었다.
즉시 시장으로 돌아와 구할 수 있는 시장바닥의 모든 담배를 뫃으니
1 보루 (10갑)쯤 됬다. 내가 등에 질 수 있는만큼 힌 쌀을 받아 어깨에 미고 집으로
돌아와 그날 저녁 꿈에도 그리던 힌 쌀밥을 지어먹었다.
온 가족도 힌 쌀밥의 감동의 시간을 즐겼고, 신이난 나는 장사의 노하우를
더욱 높혀갇다. 나의 셋 여동생은 지금 모두 살아있고, 이집트로 끌려간 간혹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공담 비슷한 이야기가 됬다.
'나의 엑소더스' 이야기는 어려움속에서 삶의 노하우를 익힌 기술로
행운의 미국 예일대학 유학으로 까지 이어지고 지금도 영어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여기까지 살아오고 있다. 도리켜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더 비참한 전쟁이야기는 '나의 엑소더스' 후편으로 더 써 나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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