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화진
반시는 늘 독자와의 소통이 어렵다고 합니다. 싸이킥 ( Psychic-靈媒) 이 서로 맏지 않아서 해매거나 채널이 맞지 않으니 시끄러운 다른 방송으로 들리게 됩니다. " 무슨시 가 그 따위 가 있어" 라든가 "그런 것은 나도 하겠다" 라고 배척 되고 무시당하게 됩니다.
일상에 득기 좋은 슈벨르트의 가곡이나 세레나데에 익순한 사람에게 시끄러운 현대 Jazz 음악이 좋게 들일리가 없지요. 그림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실주의 또는 인상파 그림을 보아 오다가 피가소의 큐비즘, 칸딘스키의 추상 또는 밀로의 초현실주이 그림이 곱게 보일 리 없읍니다. " 저게 그림이야 작난이지, 나도 그리겠다" 고 말합니다. 멋있게 차려 놓은 케익은 싫다 하고 내가 좋와 하는 쑥 떡을 내 놓라 합니다. 물론 이는 독자의 선택의 문제이긴 합니다.
오래 내려온 전통이나 기존질서에 싫증난 예술가들, 시인, 화가, 작곡가, 조각가
들도 새로운 분야를 찾아 나섰고, 오감으로 보고 듣고 비이성적이고 초현실적, 추상적인 것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선다형 OX 시험 준비를 하고, 미술 음악시간을 없에고, 수출에 전념하고, 부동산에 빠지고, 어렵게 민주주의를 배우게 됬을때, 전래 되어온 전통적인 예술의 패턴이 슬그머니 바귀는 것에 별로 신경을 안쓰고 살어 왔지요. 먹고 살일도 급한데 그 그림은 뭤꼬, 시는 뭤꼬 했지요.
이렇게 그림 음악 까지 끌어 드려, 왜 반시의 특성과 그 지향 하는 바를 설명하려 하는냐 하면 반시가 전통적인 시의 개념을 반대한다는 오해를 풀려하기 때문입니다. 형편 없는 말작난으로 여겨 진다 던지 격열한 반감을 불러 이르키고, 화려한 전통시어에 익숙한 독자의 반감을 불러 이르 키기 때문입니다.
통속적이고 보잘것 없는 의도적인 반시적 언어와 화려하고 고전적, 감성적 장식어를 직접 비교하거나 무시해서는 반시의 특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 입니다.
반시 소고 6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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