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5일 일요일

시평 '새벽 바다'에 대하여

                                       

  
                 윤화진

               시하사가 주장하는 "시하는 행위"는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합니다.

               창작, 감상, 낭송 그리고 잡다한 시 유모어, 시 개그, 시강의, 시번역
               시화전, 시여행, 시극, 현상응모, 등단, 시집발행, 성시헌정, 축시등의
               모든 시 행위중에 詩評을 널 수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원래,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왠 말이 그리 많어 불편하게 평하기 때문입니다
               시 평론가는 그시의 모든 것을 그 시인보다 더 잘 아는것 같아 보입니다
               성경의 시편, 불경속의 시들, 사서오경의 시경에서 시작하여
               용비어천가, 김지하의 오적시, 고은의 만인보는 노벨문학상 감이란다.
               윗동래 아래동래 모두 시를 좋아하고 관심이 많은데, 우리 시하사 하고는
               별로 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시의 사회적, 정서적 창조성 의 기능을 여기서 길게 논할 생각은 없고
               시하사 카페에 들어온 단혜의 "새벽 바다" 를 통해 얻는 시행위의
               대리 만족을 살펴 볼 수는 있겠읍니다. 비록 오리지날 시 행위는 아니드라도 말입니다.
               
               우선 해 뜨기전에 바다에 나가봐야 알어요. 아무리 좋게 보아도 해 뜨기전
               바다는 을시년 스러울테고, 바다와 해는 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시하사 여러분은 시간이 되면 새벽 바다에 멋있게 한번 다녀 오셔서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무었을 느겼는지 카페에 올려 주세요.

               단혜는 바다에  늘 함게하는 고민과 번거롭게 따라 다니는  선입견을 묻으려 했지요.
               스스로 구원한다는 지적 능력, 시적 감각으로 신비스런 하루를 조심으레 열려고 합니다.
               해가 떠오른 바다는 화자가 가려는 길을 밝혀주려 합니다.

             . 여기서 화자 (단혜)는 시 행위의 극치를 느끼게 됩니다. 독자는 바다에 젖어
               바다위 해를 향해서 높이 떠 오를 수 있지요. 쉽게 말해서 붕 뜨게 됩니다.
               이 시의 효능은 좋은 보약 한첩 마신듯 비싼 약 값을 하지요. 좋은 시는
               좋은 의미의 환각제 일 수 있지요. 이것을 맏나기가 어렵읍니다. 시하사 모임은
               이를 찾아 나서는 修道의 길일 수도 있읍니다. 

              새벽 바다의 시 구조를 보면 4절14행으로 되있는데 각행과 절로 나누어서 살펴 보지요.

              1연의 4행은 화자가 새벽 바다에 닥아 갑니다. 동이 트기전이라 어두운 
              바다이고 파도는 잔잔하고 조용하지만 가슴에는 먼 북소리 울리고 늘 긴장된 시인의 
              설래임이 있읍니다. 무었을 찾으려는 이 詩想의 세계는 시인이 안고 사는 고뇌이고 
              행복이기도 하지요. 바다에서 들릴 법한 먼 북소리는 그 여운이 산이나 들에서 보다는
              섬득 하기도 하지만  정겹게 들리는 부드러운 마음의 소리 이기도 합니다.

            . 화자는 평온을 찾으려 "특별 할 것 없는 특별한 바다"에 도전 합니다.  "나만의 바다"는
              어떤 바다 일까요. 그거대한 자연을 소유하려는 시인의 바람이고 외침 이지요. 
              그러나 바다는 바다이고 한발 내 디디면 빠지는 바다를 서뿔리 건드리지 못하고  
              화자가 살어 가는 세상사리 처럼 위험을 인지하고 자연의 현실로 돌아 오지요.
              "산다는 것이 바다위를 걷는 것 처럼" 의 은유 (메타포)는 1 절의 정점입니다.
              시의 창조적 직관을 잘 발휘했읍니다. 그래서 1 절 4행은 모두 폭풍처럼 모라칠 화자의
              삶의 고뇌  "비밀스런 불안" ,"무모한 열정", 늘 따라 붇는 "무수한 선입견 " 다룰 배경을
              마련하고 숨 고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연 은 자못 反詩的입니다. 대층적인 어휘의 구사를 통해서  화자의 격열한 삶을 
               엿 볼수 있읍니다.1행 "가슴에 폭풍 처럼 잠자는" 에서 "가슴에서 잠자" 라는 표현이
               반시적입니다. 몸이 아픈 것보다 가슴이 아픈 것이 더 시적이고 폭풍처럼 잠 자는
               모습이 과장일 수 있지만 반시에서는 권장되는 특성이고 기법입니다.
               "비밀스런 불안"을 안고  편안히 잠 잘 수는 없지요. 화자의 불안이 어덯게 생겼는지 
               밝히지 안으려고 "비밀스런"  수식어를 붙였는데 독자들은 궁금 하지요. 살어
               가는데 왜 불안이 없겠어요, 아래 3절에 나오는  "무모한 열정"  "무수한 선입견"이 
               '비밀스런 불안" 의  원인이 됬을 법 도 하지요. 

                2연 2행은 살어 가는 지혜를 바다에게 告解하며 평온을 찾으려 합니다. " 조금식
                끄집어내는 일에 익숙한 날들",  참 다행 이지요. 반시에서는 폭풍같은 불안에는
                더 격열한 해결책을 찾으려 할덴데요, 자살을 꿈꾸던가 바다에 뛰어 들던가 해야
                앞뒤가 맏지요. 아니면 유머어로 대처해서 " 삶이란 다 개 같은거야" 하고 새벽 바다에서
                험악한 장면을 연출 하지요. ( 윤화진의 反詩 小考 참조) 서정적 반시는 얌전 해요.
                참 다행에요.
               
                3연의 6행은 "새벽 바다" 시의 기승전결의 전 에 해당하고 크라이막스 이지요
                새벽은 밝아 오는데 화자는 잘못을 찾아내서 타협하고 평상으로 돌아 오려는 모습이
                처절 하지요. 무모한 열정 에서 "무모함"을 알었다면 욕심이 앞 섣을 것 이지요.
                세상은 그리 녹녹하지 않어요. 평자가 잘 아는 가장 열정적이고 누구나 성공했다고
                보이는 분의 고백을 들어 보면 하려는 일의 90%는 안 되더라고 합디다.
                무모한 열정은 자극적인 시어로서 좋지만  "가추어 지지 안은 시도" 를 의미하고
                너무 실망하는 화자가 안스러 보입니다. 이 작품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화자의 느낌을 언급해서 작품평의 선을 넘어 선 것 같읍니다. 그래서 시하사는 "오버"하고
                오해를 받을 수 있읍니다.

                평자가 "새벽 바다"에서 가장 집중하는 "무수한 선입견" 은 누구나 살면서 저지르는
                잘 못입니다. 성경의 "사마리아의 여인"이라는 선입견에 관한 중요한 사건이 있읍니다.
                흔히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인데, 그 피해의 사례는 크고 견디기
                어려울 수 도 있읍니다. 사회적 강자는 교만에서 약자는 심리적 위축에서 선입견이
                낱아 날 수 있읍니다. 스스로 패배의식을 갇는다 던가 스스로 포기 하게 되는 일이
                버러질 수 있지요. 잘못 하다가는 증오를 불러 이르키고 공정하고 편안한 인간 관계를
                그르 칠 수 있읍니다. 여기서 벋서 나려면 禪 에서 말하는 平常心을 찾기를 권합니다.
                "도피"가 아니라 극복의 문제 이지요. (중국 철학자 존 우드 저, 서돈각 역 "선학의
                전성시댸 참조) .

                4연 의 1 행은 요지음 같은 종교와 신앙의 과잉시대에서 보기드문 자기구원의 외침이지요.
                자신이 있어 보여 좋와요. 평자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어 왔는데 좀 타협했어요.
                스스로의 판단과 그 결과에대한 책임은 지되 때로는 초월자의 입김이 필요 할때가 있다고
                느껴지면서, 이성 과 신성 의 결합이 지적 판단을 그르치지 않는다고 믿고서 부터입니다.
                그리고서 불안한 하루를 열면 더 평온해지지 않겠어요.

                전편의 흐르는 시상과 형식미, 내용미는 가추었고 다소 겸손하지 안은 외침이
                새벽 바다에서 어절 수 없었다면 흠이 되지는 안겠지요.  시적 감흥을 주는
                성공한 작품을 축하하며 끝으로 중국 유명시인 두보의 시에관한 구절을 여기
                보태어 적읍니다.

                                           語不驚人하면 死不休라.

                "시에서 적은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면 죽어도 시 짓는 일을 쉬지 않겠노라"

                  詩作態度 의 근엄함을 말 하지요. 배워 익힐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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