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3일 금요일

시평, 연명지의 '나에게 주고 싶은 말'



                                                                 
윤화진

가끔은 자신을 바라보고 하고싶은 말이 있을 법 합니다. 그러나 여간 인생을 달관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쑥스럽고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읍니다. 연명지 시인은 자신을 뚝 띠어내 안쳐 놓고 속내를 전 하고 싶은 것이지요. 살아가며 좀 불편하고 미진했던 일들 또는 아쉬웠던 일들 찾아내서 다독이며 고쳐주고 싶은 심정을 이 시에 담고 있읍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자신을 성찰하며 쓴 책으로 성경을 비롯해 세계 10대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써서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의 공감과 회한, 반성을 자아내,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있지요. 연명지 시인의 이 시는 자신에 관한 작은 수상록이기도 하지요.

시어의 문체는 수려하기 보다 짧은 행에서 꽉찬 뜻을 담고 있어서 쉽게 읽기 어렵읍니다. 시의 시각적인 나무 모양의 디자인이 주는 압박감이 시각적인 감각을 줄 수는 있어도 시가 전하는 내용전달 효과는 적다. 서론이 길어 졌느대 행별로 자세히 들려다 보지요.

첫 2행은 여유도 주지 않고 자신을 힐책합니다. 나이 들면서 키워온 고정관념이나 남에대한 배려 없이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관습(문화) 를 바꾸자는 것이지요. 그래요. 나이 들면서 누구나 그렇개 살어 왔지요. 마음 고쳐먹고 타인을 이해하고 호탕하게 웃을 넌지 그장면이 궁금한데, 가볍게 미소지어도 될 듯 하지요. 

제 3행은 話者의 신앙생활을 엿보게 하지요. '매일 매일 하늘 보며 손 흔들어 주세요'. 활기 찬 모습입니다.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다고 신호를 보내지요. 하늘에 잘 있다고 손 짓 하는 모습이 엎드려 기도 들이는 모습보다 한결 신선 해 보여요. 믿음의 확신이 있어요. 덩 빈 하늘과 소통하고 있지요.

아! 시 쓰기 말인가. 이 시의 4 행은 시를 쓰라고 권하고 있지요. 평자는 시의 예찬론을 넘어서 "시하는 사람들" 의 시의 행위주의를 일커러서  詩狂 이라고 자칭 하는 마당에 무었을 더 언저 말 하겠어요. " 맛있는 시던 맛 없는 시던 삶을 풍요럽게 한다면 무었을 더 바라겠어요. 같은 행 머리에서는 " 메마르고 건조한"  삶을 피하기 위해서 책과 시를 가까히 해보라고 하지요.

누군가 인생이 아무리 화려하고 바쁘게 지내도 때로는 '양 처럼 지루하고 늑대처럼 외롭다'라고 했어요. 양은 순해서 지루하고 늑대는 용맹해서 외롭지요. 혹시 독자들은 이럴때가 없었나요. 책과 시는 완숙하고 낭만적인 삶의 바탕이 되고, 보드래르가 말하는 무서운 권테에서 벋어 날 수 있지요. 메마르고 건조한 삶이 인간을 어두운 늪으로 몰아가서 파멸이나 자살을 생각하게 할 수 도 있읍니다. 요지음 주변에서 자주 일어 나는 사회 현상이지요.

요지움 TV/대중매체를 통해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는 "나는 가수다" 등의 대중오락 프로그램에 몰입되는 상업적인 사회현상을 보면, 책이나 시 따위는 구시대 유물처럼 보입니다. 언제 한가롭게 조용한 차 집에 앉아서 책 읽고 시쓰고 하면 좀 시대에 뒤 떨어진 '아나로그' 시대 사람으로 보이지 않나요.

더 충격적인 것은 그 프로그램에서 노래하는 가수를 보고 눈물 흘리는 관객을 Close-up
하고 모두가 그런 대리 만족을 자아내게 하고, 예술성보다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대중오락 문화를 탓 할 수 있을가요. 조용한 찻집에서의 시와 낭만은 이제 '그만 가라'는 외침으로 들리고, 오기로  "나는 시인이다" 라는 시인경연대회를 꿈꾸어 보지요. 모두 좀 미쳐 가고 있는가요. 그래도 평자는 "책과 시" 편에 남습니다. 평자는 궁금해서 그 선풍적인 인기가수의 CD를 사서 들어 보았는데 그 값싼 흐느적거리는 노래보다 허름한 시한편이 더 감명적이니 평자는 분명 구시대적인가 봅니다.

여기서 유안진의 시 '내가 나의 감옥이다'를 보지요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었지만 /두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었는지/무었에다 두 눈 다 팔어먹었는지/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내 안은 안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을 피하느라/나를 내속으로 가두곤 했지.

왜 '나에게 주고 싶은 말' 연명지 의 시가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 오는지 잘 알려 주는 
시 이지요. 남의 노래듯고 졸도하듯 좋아는 사람들을 탓할 수 없지요. 그러나 좋은시 읽고 자신을 드려다보는 일도 그리 시시하거나 휘지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제 5 행은 이제 話者는 조용한 찻집에 앉아 옆서를 씁니다. 누구에게 라고 정하지 않고 마음 가다듬어 소식을 전 하려 합니다. 누구에게 무었을 전할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잡다한 세상 잠시
접어두고 자신으로 돌아와 앉아 있는 모습이 정적이고 온화하며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여기에 등장 하는 '빨간 우편함'은 이 장면에 잘 어울리는 소품으로 무언가 기다리는 사람을 연상케하는
장면을 잘 연출 했다고 할수 있지요. 이 자그마하고 조용한 찻집은 연초록색 이였을 것 같아요.
모두 잘 어울리는 곳에 앉어 있는 시인 좋아 보여요.

방금 쓴 편지 "못 부치면 어때요" 라고 한발짝 물러나는 겸손과 위로는 편지쓰느라 받은 "스트레스" 를 풀어주지요. 화자의 의도는 결국 편지쓰는데 있지 않고 다만 자신을 조용한 곳에서 자신을 반추 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일러 주는 듯 하지요.

제 7 행은 돌발적입니다. '시간 아겨쓰기'와 '손톱깍기'와의 연결을 찾기 힘듭니다. 평자는 이대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이틀이 걸였어요. 시어가 지니는 함축성과 은유가 이렇게 독자에게 도전하면 난해시로 분류됩니다. 손톱자라듯 천천히 다가오는 시간이라고 여유를 부리지 말라는 경고인 듯 합니다. 이 어구가 시에서의 은유법의 적절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자신에게 주는 어구의 선택과 사항설정이라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살라는 권유는 당연하게
들립니다. 밋밋하거나 권태로운 삶은 할수만 있다면 모두가 피하려 하니까요.

8행에서 화자는 다시 자기자신 속으로 돌아와 '차가운 바다를 오래 오래 바라 보지요' 열정을 가지고 살라고 하더니, 갑자기 차가운 바다를 바라보는 반전은 너무 건너 뛰는 듯 하지만 '열정 과 차가운 바다'의 비유법에서 표현의 강조효과를 기대 할 수도 있읍니다. 솔직히 독자들에게는 읽어 가기 불편 하지요. 그러나 바다는 어느 시에서나 자주 등장하는 배경 또는 소재입니다. 그러면 차가운 바다를 바라보며 무었을 생각할가요. 시인은 만만치 않은 세상 그리고 슬픔과 고뇌를 오래오래 응시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지요. 시인다워 보이지요.

아 ! 제 9행, 이시의 Climax  '슬픔은 겁을 주어 몰아내고' 입니다. 이해인 수념님도 시에서 슬픈 사람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요. 아래 예문을 보지요.

슬픈사람에겐/ 너무 큰소리로 말 하지 말아요/ 마음의 말을 은은한 빛갈로 만들어/ 눈으로 전하고/ 가끔은 손잡아주고 / 들키지않게 꾸준히 기도해주어요/ 생략... / 훈계허거나 가르치려 들지말고 가만히 기다려 주는것도 위로 입니다/ 생략... 위로에도 인내와 겸손이 필요하다느걸/ 우리 함게 배워요. 마음이 약한 슬픈사람에게 할수 있는 수녀님의 말이지요. 위안은 되도 해결은 안됬을 거에요.

여기 연명지의 적극적인 슬픔의 해결 방법이 특허를 낼만한 시인의 발견입니다. '슬픔은 겁을 주어 몰아내고 희망은 꼭 붙들고 있어야해요'. 수녀님 기도 방식과 시인의 적극적인 슬픔에 대한 대처 방식은 독자가 선택하고 결정하세요. 평자는 어절수 없이 시인 편입니다. 왜야하면 삶과 슬픔에 대하여 시인의 창조적 직관으로 이해된는 현실적인 삶의 길 잡이를 시인 말고 어느 누가 줄 수 있을 까요. 슬픔은 소리쳐 겁을 주면 분명 달아날 것입니다. 해 보세요. 시적으로 해보세요. 행동으로 옮기고 슬픔에서 벌덕 일어나 보세요.

보통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미혹(Mystic) 에서 벗어나는 성숙한 신앙은 성직자에서도 흔히 찾어 볼 수 없는 높은 의식수준 입니다. 혼미(混迷)또는 곤혹(困或)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간증은 흔히 Mystical 하다고 해서 교황청이나 개신교에서도 흔히 받어드리지 않지요. 다른 교에서는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지요. 토속적인 순간적 샤만니쯤의 퇴페를 깨우친 화자는 바로 시적 영성생활 또는 영성적인 지적 시를 쓸수 있는 터전을 보이고 있지요. 이 부문에서 더 정진 하세요 이 수준에 머믄 지성을 가춘 교인을 흔히 접할 수는 없지요. 기복신앙과 일방적 호교주의 또는 가추어지지 않은 맹목의 구원주의의  지나친 광신적 선교에 빠지는 현상에서 벗어난 시인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평자의 '시하는 사람들' 의 선언문 중에 '우리는 시를 존중하고 따르지만 곤혹에 빠지지 않는다" 라고 말 하고 있았지요.   

연명지 시인에게 성공적인 시를 축하하고  끝으로 이 시의 끝행 '나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는 속으로 간직하고 삭제하는 것이 좋을듯, 독자가 다 알고 있어요. 다분히 Anti-climax 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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