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2일 목요일
시평, 도스트에프스키와 가을
-단혜의 가을 필사기를 읽고-
윤화진
시베리이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 는 모스코의 한 작은 지하실 방을 얻어 참담한 생활을 시작한다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당시 러시아의 지성인의 어두운 생활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나는 지난해
겨울 모스코를 방문한 기회에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의 안내로 현제 살아있는 최고의 러시아 조각가 포톡키의 저녁초대를 받었다. 바로 도스토엡스키의 지하생활자의 거실을 연상 할수 있는 바로 그런 곳이였다.
높은 예술성, 그런 감각을 지니고 사는 조각가에게 다소 어울리지 않는 생활의 어려움이 베어있는
그런 지하실 이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그의 기개가 높고 당당한 인상을 받었으며 친절하고 자상한
저녁 식사대접을 받었다. 그 모스코의 지하실 방에서의 나의 체험이 단혜의 '가을 필사기'와 연관이 생길
줄은 미쳐 몰랐다.
시의 서문 부는 이러하다.
높은 이상과 철학적이념을 지닌 러시아의 젊은이가 지하실을 벋어나자 몸과 마음에 다가오는 현실과의
괴리를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간혹 이런 해어날수 없는 자괴감과 현실과 잘 타협할 수없는
분노의 계절의 콤푸랙스 속에서 자탄하곤 하는데, 아 !! 단혜 이좋은 계절에 붉은 피를 토해내는
가을 필사기는 너무나 자신에게 또는 독자에게 잔인한 시 행위임을 증명했읍니다.
첫행, ' 해만 봐도 눈물이 나, 가을인가 봐' 의 단혜 친구이 독백은 허구인지, 진실인지 가늠 할 수 없지만
이시를 여는 행으로써 충분하다. 그리고 감탄사 '!' 하나로 대구했으면 그 내용보다 형식주의 시로서
구색을 가추었다고 할수 있지요. 흔히 하는 아-- 하고 외치는 수법보다 간결하고 덜 진부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고 왜 '해를 보고 눈물이' 나는지에요. 분명 "해" 말고 다른 것을 보고도 눈물이
나는데, '해만 봐도" 라고 긍정적 조건부 가정법을 도입했지요. 가을이 다가 오면서 민감해지는
시인의 감성은 이해되지만 "높은 가을하늘'. '단풍이드는 산등성',' 맑은 계곡물' 등 가을의 장치물들은
물론이고 '해'마쳐 눈물나게 하는 감성은 초현실적인 인식이 아니라면 과장이거나 인식과 감성의
혼란이 의심된다. 다만 시와 미의 창조적 직관이 작용했음을 인정하고 싶다. 아니면 도스토엡스기의
지하실생활자 의 암울한 인식과 알버트 카뮤의 '이방인의 실존주의적인 혼돈'이 작용한 듯 하다.
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가을인가 봐' 하고 외쳤다면 가을을 그리워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의 2행에서 화자의 본 색이 드러나지요. 해만 봐도 '가을은 그럴게 치명적 슬픔으로 다가 왔다' 단혜의 슬픔인지 '지하생활자'의 슬픔인지, 화자의 의중을 간접으로 의인화해서 표현했는지 불 분명하지만 '햇살이
심장을 관통했다' 는 이후에 나오는 행에서의 절규를 본다면 해와 치명적인 슬픔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가뮤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짜증스런 해빚 때문에 해변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아무런
죄책감을 느기지 못한다. 해만 보고 그처 '치명적인 슬픔은 느끼면 삶의 실존주의적 허무감을 느긴 것을 알수있다. 평자는 성경의 신약중 묵시록을 읽는 듯한 느김을 받느다. 한 사건으로 인한 결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마는 심정이다. 쓸픔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3행의 ' 희망도 없고 희망아닌 것도 없는' 의식의 공황상태에 이르면 가을은 무의미하다. 시의 화자와 대화하는 '지하생활자'의 일상의 의식이 오늘 우리의 생활모습 아닌가. 계절의 변화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가을이 왔다고 무슨 희망따위가 떠오르겠는가. 귀찬을 뿐일게다. '회망 아닌것도 없으면' 부정의 부정이 부른 긍정의 의식은 지하생할자 들의 분노의 생리이리라.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이 모두 못마땅한 것이다.
4행의 '치통 즐기기'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다. 견디기 어혀우면 즐기라고 하는 역설적 긍정이 아무레도 가을시에는 무리인 것 같다. 치과에 들르기는 즐거운 일이 아니지 안은가, 단혜... 의료보험도 안되고 예약도 해야
하니 좀 심하지 않으니 그리 참었다고 해두지요.
다음 서너개 행들 ' 이 딱기' '노처버린 단어' '설탕 없는 커피' 는 그냥 넘기고 '노쳐 버린 버스'는 가을 을 더
여유있게 즐기려는 '허세' 같은데, 멋있어 보여요. "노쳐버린 버스 의 아쉬움과 다음 버스를 그대로 보낸 여유" 는 가을을 즐기려는 시인의 광기 아니면 '시하는 멋'이지요. '저녁이면 조금식 달러지는 달' 우리네 마음
같아 보이고 윤회의 원리를 여기서 보지요. 끝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달님의 바보같은 행위'에서 위안을 받으려는지 깜박이는 마음은 "깃발 처럼' 나부기고 생기를 얻는다. 그러나 곧 '햇살을 심장을 관통하는 쓰라림 그리고 피를 토하는' 절망하는 비극'으로 가을을 '필사' 하려는가. 빨간 시작 노트에 가느다란 0.25mm 팬으로
꾹꾹 눌러 자국을 남긴다. 단혜의 절망하는 가을이 아니기를 바란다. 도스트엡스기가 거처하던 모스코의
지하실생활자들의 슲은 수기는 오늘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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